2024년 시제에서 중국 기산허씨 종친들이 보내온 축문을 사회자가 설명했고, 명예회장의 보충 설명을 통해 일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이해가 부족하여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임을 전제로 종사에 관심이 많은 종인의 입장에서 기술해 봤다. "허왕후 보주 도래설"로 연대나, 역사적 근거로 주장하는 사학자와 달리 인류문화적으로 접근해 보았다. 묘비는 일반적으로 고인의 생전 직책이나 관향(貫鄕)이 새겨져 있는바, 허왕후가 가야로 도래를 허왕후릉 비명(碑銘)의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란 묘비 표지석에 근거하여 생각해보았다.
사학자들이나, 다양한 서적들은 허왕후의 관향은 현재 중국의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이라는 설로 가장 설득력 있게 알려져 있다. 안악현은 주나라에서 송나라까지 보주(普州)라 불렀으며, 허왕후 선대 조상들은 인도 아유타국에 살았으며 기원전 후 북방 월지족에 전쟁에서 패해 미얀마를 거쳐 중국의 보주 지방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고대 중국과 미얀마는 옥을 교류하였던 “옥의 길”(jade road)이 있었는데 허왕후의 조상들도 이 길을 통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 “후한서”에 서기 47년 사천성 보주 인근의 남군(南郡) 지방에서 만족(蠻族)인 뇌천이 주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되었고, 뇌천을 따르던 7000여 명을 강하(江夏)지방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50여 년 이후인 서기 101년 남군에 속하는 무현(巫縣) 지역에서 과중한 세금에 불만을 품은 허성(許聖)이 주동하여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어 강하지방으로 이주당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를 근거로 사천성 보주 지방에 살던 허왕후 일족이 서기 47년 반란 당시 뇌천과 함께 봉기하였다가 패하여 강제 이주할 때 탈출한 지도부의 일부가 가락국으로 왔고, 보주의 인근 무현 지방에 남아 있던 허씨의 후예인 허성이 나중에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허씨 일족이 보주에 살았다고 추정해 본다. 그 증거로 허왕후가 시집올 때 한나라 시장에서 나는 물건들이라는 “한사잡물”(漢肆雜物)의 표현과 예물로 가져온 미얀마에서 나는 보석인 “경옥”(瓊玉ㆍblack stone)을 예로 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마을에는 신정(神井)이라는 우물이 있었고, 바위에는 우물의 유래가 적혀있는“신정기”(神井記)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허황옥이란 소녀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신정기”는“옛날 이곳 허씨 집성촌에 허황옥이란 소녀가 살았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지혜로웠다. 어느 때 큰 기근이 들었을 때 누군가 이곳 우물에서 하늘에 간절히 기도를 드리니 우물에서 매일 고기 두 마리를 얻어 가족의 목숨을 구했다”라고 쓰여 있다. 허왕후가 공주일 때 이름이 허황옥인데“신정기”내용에도 같은 이름으로 나오고, 그녀가 태어난 시기가 동한초(東漢初)라고 쓰여 있는바, 삼국유사의 허왕후와 동시대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허씨 사당 입구에 걸려있는“쌍어문양”이다. 쌍어문(雙魚紋)은 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있고 북인도(北印度) 아유타국에서도 볼 수 있고, 중국 허씨 사당에도 있다. 그리고 보주라는 지명의 동일성, 허씨 집성촌 그리고 “신정기”의 내용, 쌍어문 등을 근거로 이 문제에 천착하면서 인도,중국 등을 수차례 답사하고 인도 아요디아ㆍ중국 보주ㆍ가야로 이어지는 전래 경로를 추정한 한국의 문화인류학을 개척한 김병모 박사도 허왕후가 가야로 출발한 곳이 중국 사천성 안악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대 아시아 대륙에서 극한의 베링해를 건너 미주 대륙에 정착한 아메리카 인디언도 있는데, 같은 대륙인 인도나 중국에서 오는 것이 뭐가 두렵고 어려울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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