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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개성공단 우리은행 지점장의 의성 허준선생님 묘소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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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거 개성공단에서 우리은행 지점장으로 파견을 나가셨던 윤석구 선생께서 2025. 6. 7. 파주 문산에 있는 저희 사무실에 들렀다가 의성 허준선생님 묘소를 다녀 오셔서 필자에게 보내 준 좋은 글을 공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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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DMZ 허준 선생의 혼과 분단의 여운이 깃든 풍경 속으로]
개성공단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은 제 삶에 잊을 수 없는 짙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인터넷조차 닿지 않던 그곳에서 격주 주말에야 서울로 향할 수 있었던 그때, 답답함 속에서도 우리는 소소한 일상에서 빛을 찾곤 했습니다. 조성된 공장 부지에서 가슴속 응어리진 쓴 마음의 골프공을 날리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으면, 저 멀리서 짚차를 몰고 온 북측 관리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윤 선생은 왜 미국놈들이 좋아하는 골프공만 때리냐? 공을 치니까 원수놈들 때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그들의 유쾌한 도발에 내가 "그리 미워하는 미국놈들이 쓰는 영어를 왜 쓰냐?"고 반문하자, 그들은 "우리는 영국말 쓰는 건데 어째 미국말 쓰냐고 말하냐?"는 재치 있는 답변으로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습니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피어나는 이런 인간적인 교감들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며 3년을 버텨냈습니다.
그럼에도 연휴가 3일씩 이어질 때의 그 답답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이들이 너무도 보고픈 마음에 꾀를 냈습니다. '시재금 달러가 소진되어 기업의 예금 인출이 불가능하니 시재금 조달차 긴급 출경을 요청한다'고 했습니다. 긴급 사고 외에는 전무했던 개성공단 출입경 시스템, 특히 북한 군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열리던 DMZ 통문이 매우 특별하고 기발한 요청에 따른 달러의 힘으로 열렸을 때의 그 해방감이란! "야호, 아랏차차!"를 외치며 군사분계선을 넘어 임진강 두지리 마을을 먼저 찾았습니다. 공단안 함바집같은 식당에서 삼시세끼 입맛에서 장어와 참게 넣은 메기 매운탕에 폭탄주 일곱 잔을 곁들였던 그 꿀맛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혀끝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난 7일, 바로 그 두지리 마을 건너 임진강 너머에 동의보감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묘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뜻밖의 기회로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님과 허준 선생의 후손이신 허현강 작가님과의 만남에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토록 꿀맛을 선사했던 두지리 "두포나루터" 매운탕집에서 추억을 되새기며 점심을 나누고, 허현강 작가님의 책 『의성 허준의 동의보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장 묘소 참배를 위해 임진강을 경계하는 늠름한 경계병에게 예를 갖춘 후, 강을 건너 '허준로'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설렘과 경건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3년 전 조계사 진관스님께서 보내주신 사진 덕분에 이곳에 묘소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TV 드라마를 통해 허준 선생이 경남 산청 출신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후손 허현강 선생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드라마 작가의 오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허준 선생은 1539년,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경기도 장단군에서 태어나 1615년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23세에 내의원에 들어가 의술을 펼치기 시작한 선생은, 특히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도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송하는 호종관의 중책을 수행하며 나라와 백성을 향한 깊은 충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공로로 임란 후 당상관의 품계에 올라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묘소에 당도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허준 선생 아버님 묘소에 얽힌 이야기였습니다. 1945년 3.8선이 그어지면서, 1947년까지 후손들은 성묘를 다녔지만 이후 아버님을 비롯한 선대의 묘소는 남북으로 갈라진 북한 땅이 되어 직접 찾아갈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반면 어머님 묘소는 허준 선생의 묘소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는 서자였던 허준이 본가 묘역에 묘를 쓸 수 없었던 당시의 한계 속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묘소마저 한 문중 가족의 단절된 역사가 곧 한반도 분단의 슬픈 자화상임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울러 유일한 종원으로 홀로 남으신 허현강 작가님의 각고한 노력 끝에 재발견된 의성 허준 선생의 묘소는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위치마저 불분명했던 묘소는 1991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9번지에서, 의식 있는 1사단 군 지휘관의 협조와 작가님의 조상을 향한 발굴 조사를 통해 "양평군 허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 조각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다시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마치 허준 선생 자신이 후세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던 듯, 그 극적인 재발견의 순간은 후손의 말씀과 묘소 현장을 직접 보고 책을 읽으며 전율을 고스란히 안겨주었습니다.
허준 선생의 의술과 학문적 깊이는『동의보감』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듯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1596년 선조의 명을 받들어 1610년 완성된 25권의 이 의서는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의 다섯 강목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순한 치료법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하는 도학적 철학이 그 근간을 이룹니다. 질병의 증상과 약재, 치료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도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은 백성을 향한 선생의 뜨겁고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동의보감』은 한국을 넘어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의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의학 서적을 넘어, 동양 의학의 정수를 집대성한 인류의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고, 실제 저의 조부께서도 심양에서 의술과 침술을 공부하시고 고향마을에서 환자들을 치료하셨기에 공감되는 부분이 더 큰 것도 사실입니다.
후손의 안내에 따라 먼저 재실에서 정중히 삼배를 올렸습니다. 후손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상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분이 세 분 계십니다. 성군(聖君) 한글창제의 세종대왕,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身戰船 尙有十二)의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 그리고 의성(醫聖) 허준 선생이 바로 그분들로, 삼배(三拜)는 성현께만 드리는 예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재실에서 정중히 술 한 잔 올리고 비문을 읽은 후, 다시 묘소에서 어려운 병자를 위해 위대한 의술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 선생께 깊은 경의를 표하며 삼배를 올렸습니다. 또한 묘역조성 및 허준선생의 묘역에 나타난 수호지신이라 할까 백사(白巳) 출현 이야기도 겸해 듣고 다음 방문을 약속하며 묘역을 나서는 발걸음은 깊은 여운뿐이었습니다.
의성(醫聖)의 묘소를 방문한 올해는 공교롭게도 6.25 전쟁 발발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04년부터 2016년까지 12년간 운영되었던 개성공단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 적화 야욕에 의해 불가피하게 폐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의 한이 75년 이어지듯, 저 또한 함께 근무했던 두 명의 북한 여직원과 이별한 지 어느덧 18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결혼식 전 임신으로 남측 선생들한테 창피하다며 임신중절수술까지 했던 명옥 동무와, '우리은행에 가서 일하라'고 해서 북한 쪽 은행인 줄 알았다며 해맑은 웃음을 짓던 옥경 동무.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그 시간 그 추억들,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저의 통일금융인들입니다.
오늘 허준 선생 묘소에서 분단의 아픔을 다시금 절감합니다. 1945년 분단으로 인해 허준 선생 선대들의 산소는 3.8선 DMZ 북쪽에, 선생의 묘소는 다행히 군사분계선 바로 입구에 있어, 후손은 선대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서러움을 머금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허현강 작가님의 아픈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님의 예기치 않은 제안으로 시작된 이번 여정은, 파주 임진강 두포리에서 마주한 허준 선생의 묘소가 단순한 역사적 공간이 아님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곳은 한 위대한 인물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남북 분단이라는 현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의성의 지혜와 헌신이 담긴 『동의보감』처럼, 허준 선생의 존재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임진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듯,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허준 선생의 백성을 향한 마음, 허현강 작가 후손의 선조를 향한 효심, 그리고 개성공단 명옥·옥경 동무들과의 인간적 정이 그러합니다.
우연히 2025년 6월 7일, 임진강 두포나루터에서 품은 다짐, 허준 선생 묘소에서 느낀 감동을 가슴에 품고 언젠가 모든 이산의 아픔이 기쁜 재회로 바뀔 그날을 위해 작은 희망이라도 되겠다는 마음을.
그렇습니다. 의성 허준의 이름은 만고에 빛날 것이고, 그 빛이 분단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 우리 모두 자유롭게 오가는 통일된 땅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5.6.7. 임진강 두포리에서
by Skyoon
윤석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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