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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촌 허룡 선생은 1931년 충청남도 서산군 에서 부 허후득(1895년-1946년)공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허후득 공은 한학자였으며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주동자로 1919년 4을 8일 밤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정원백의 집으로 주민 50여명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만세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한 뒤, 그 들은 보현산 위에서 봉홧불을 올리고 나상윤 황군성 등과 함께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부친이 작고할 때 지촌선생은 나이 14세로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5세부터 부친에게 배운 서예와 한문 실력으로 한때 서기로 공직생활을 하다가 뜻한바 있어 서울로 상경하였으나 계획 했던 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35세에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서예학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38명의 화가들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수출하는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것이 직업적인 화가로서의 첫 발걸음 이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인 취향의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허룡 선생은 한국의 전통 화법을 고집 하였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새 시대가 열려 외래문화가 쏟아져 들어와도 그 기회를 활용하여 명예와 부를 쌓지 않고 '나만은 우리 것을 지켜야지' 하는 생각으로 오직 전통적인 한국미술의 연구와 학습에만 정진 하였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나름대로 체계를 세운 화법과 서법을 탄생시킨 선생의 작품이 차츰차츰 미술애호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존 허룡 선생은 한국 선배 화가들과 일본, 중국 등의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살리고 익히며 수많은 연구와 연습을 반복하면서 자신만의 기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학으로 고금의 동양화를 섭렵하여 보고, 분석하고, 수많은 연습을 거쳐 태동된 걸작들은 한국의 서예와 전통 등양화의 맥을 잇는 이 시대의 디딤돌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촌 허룡 선생은 평생을 연구하고 터득한 동양화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전통동양화보' 1.2권과 지촌허룡서화집'에 담아 후진들의 동양화 공부에 길잡이로 제공 하였습니다 허룡 선생은 지난 1999년 :전통동양화보' 제1권을 펴낸 지 꼭 8년 만에 '전통동양화보' 제2권을 펴냈습니다. 여기에는 붓글씨로 시작하여 사군자, 문인화, 화조화, 동물화, 초충도등을 비롯 하여 문인산수화에 이르기까지 한국화의 영역을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의 미술계는 작품의 우수성보다는 대전 수상경력과 출신작가의 배경이 된 학력중심으로 즉, 학맥증심으로 미술권력이 독점되어 왔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 학맥도 없고 인맥도 없으며 미술공모전에 한 번도 출품한 적이 없는 비국전파인 재야작가가 독학으로 화단에서 인정받 는 화가가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촌 허릉 선생은 각종 민전의 심사위원을 두루 거쳐 2002년에는 관례에 없이 한국미술협회 로부터 대한민국 미슬대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고문으로 있었습니다. 양천허씨 대종회에는 2006년도 대종회 고문으로 추대받아 오면서 평소 소장하고 있던 임자보(1852년)와 대동보 원본 12권 1질과 양천세고 3권 1질을 대종회에 귀증하여 대종회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선조유고인 “ 가전충효 세수청백” 친필을 양천허씨 각 가정에 보급해 주셨으며 2001년 1월 1일 인도 아요디아국의 허왕후 유허지에 가락중앙 종친회에서 허왕후 공원을 조성하고 허왕후 유허비를 수립하였는데 한국의 서예대가로서 지촌선생의 필체로 직접 비문을 써 주심으로 허문의 명예와 그 자취를 인도 땅에 영원히 남기시고 94세의 연세로 타계하실 때 까지 국가와 종사 일에 온 정성을 다 바쳐 오시다가 2025년 7월 7일 자택에서 사랑하는 자녀 2남 1녀를 두고 타계하셨다.
허후득공은 독립 유공자로 대전 현충원에 지촌 허룡 고문님은 6. 25 참전 유공자로서 경기도 이천 호국원에 각각 안치되어 있다.
양천허씨 전종원은 고문님의 명복을 빕니다.